인문학/책

<안셀름 그륀의 종교란 무엇인가>

Retyper 2023. 6. 6. 23:54

사진1. 교회 스테인드 글라스

 

 

신부님 한테 받은 책

종교를 가진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비교해서 어떤게 더 행복할지 신부님 한테 묻고 대화했었는데, 대화가 종결되지 못한채 헤어지면서 이 책을 빌려주셨다. 책 제목은 <종교란 무엇인가>이지만 내용은 사실 <천주교란 무엇인가>에 가까웠다. 75가지 일반인들이 자주 묻는 질문에 대한 안셀름 그륀 신부의 답변을 담은 Q&A형식의 문답책이었다. 한 줄로 요약할만한 주장을 펼치는 책이 아니어서 본문 내용 중 추가적으로 생각해볼만한 질문들만 추려보았다. 이를 읽고난 내 생각이 본 포스팅의 핵심이다.

 

 

사진2. 그 분 하면 떠오르는 형상

 

 

[신은 존재하는가?]

Q : 하느님 존재는 증명 가능한가?

Q : 하느님께서는 허구나 상상의 존재 아닌가?

 

 

그거 아니야. 아무튼 아니야.

여태 봤던 다른 책에서와 비슷하게 이 책에서도 하느님의 본질을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하늘 위, 우주 너머로 멀리멀리 날려버린다.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진리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절대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절대진리는 어떠한 말이나 그림으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이 모든것을 초월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이 뭔지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뭔가 하나 잡았다 싶으면 '그거 아닌데?' 또 다른 뭔가를 잡았다 싶으면 '그것도 아닌데?' 라며 어떤 논리적 입증도 다 반박이 가능하다. 재밌는 것은 하느님은 절대 이성으로 이해할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해버리면 방금한 이말 마저 이성으로 하느님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꼴이기 때문에 '러셀의 역설'이 되어 이 명제는 모순명제가 되어버려 거짓이 된다. 하지만 뭐 그런다고 유신론자가 무신론자가 되고 무신론자가 유신론자가 되는게 아니다.

 

 

어차피 이해할 수 없다면서 왜 믿는가?

세상의 진실 일부를 밝혀내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진실이자 모든 것이라는 오만함을 경계하는 도구로서는 신앙을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핵미사일 발사버튼만 가볍게 누르면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했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물 위에 떨어진 솜사탕 처럼 사라져 버린다는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 버튼을 손에 쥔 사람이 모든 인간을 단죄할 힘과 권리를 가진 초인이 된 것은 아니다. 막강한 힘으로 인해 스스로가 다른 모든 것보다 위대하다고 자만해버리면 장엄한 우주의 흐름속에서 인류는 성냥불 비명보다 작고 짧게 꺼져 없어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모시는 하느님이 영원히 가까워 질수 없는 고귀한 선이라고 믿고 산다면 아무리 바벨탑을 놓게 쌓더라도 자연스럽게 겸손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런 겸손함이 지나쳐 과학은 발전해선 안 되고 스스로 눈을 가려 작은 세상에 갖혀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학적 호기심과 미심쩍음, 정말로 자신이 밝힌 사실이 믿을만 한지 되돌아보고 반복적으로 실험하고 또 실패하고 좌절하고, 하지만 다시 도전하는 그 멋진 추진력이 나는 더 좋다. 작은 우주만 믿고 살수도 있지만 더 큰 세상을 받아들이는 내가 더 좋다.

 

 

사진3.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극과 재앙

 

 

[신이 있다면 세상은 왜 이 모양인가?]

Q : 세상의 실상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나?

Q : 기적이 있나?

 

 

전쟁피해자, 무고한 희생자는 십자가의 메시지?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아무 잘못 없이 사망하는 사람들을 하느님은 왜 내버려 두는가 하는 문제는 한 번도 통쾌하게 답변되지 않은 고질적인 문제다. 이 책을 읽고나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는데 내용은 이렇다. "당신의 아들(예수님)을 살인자의 손에서 구하지 않았다. 나약한 인간이 되시어 몸소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견디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신다. 그로써 당신의 전능함을 드러내 보이시며 고통을 내면에서 변화시킨다". 평범한 인간인 나에게 이 모습은 무능함으로 밖에 안 보였지만 결국 이 문제도 하늘 저 너머로 넘겨버린 파악 수 없는 그런 것이 되었다. 신학에서의 전능함은 고통 자체를 없애주는 전능함이 아니라 말하자면 ‘고통을 초월한(?)’ 영적인 구원, '죽더라도 네가 없어지지 않고 하느님이 늘 지켜주실 것이다' 라는 바람, 안심을 주는 그런 것이라고 느껴졌다. 오히려 내가 가진 믿음이 무엇인지 좀 더 분명해졌다. 영화 <킹덤오브 헤븐>에서 살라딘도 그랬다. 예루살렘이 무엇이냐고 묻자 살라딘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다"라고 했다. 죽고나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름답다. 영원한건 지루할 뿐, 잠깐 아름답고 영원히 지루하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유한히 긴 우주시간속에서 반짝이고 사라지는 먼지 같은 삶이 창백하고 푸르게 아름답다. 기독교보다 외로워 보일 수도 있지만 더 순수하다.

 

 

안타까운 죽음을 직접 구하지 않는다면 기적도 하느님이 한 게 아니다

우주 탄생 이후 모든 세상을 다 인간이 지켜보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발견한 우주의 자연법칙을 벗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사과를 떨어뜨렸을때 지구 밖으로 갑지기 튕겨져 나가거나, 지구로 맹렬히 날아오던 소행성이 뿅하고 사라지거나, 죽어 썩은 시체가 되살아난다거나). 2000년 전에는 그 법칙이 잠시 깨졌고 지금은 아니라고 믿을수는 없다. 이 책도 "기적을 하느님 존재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라고 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완전히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기독교는 명백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적이라는 하느님의 현실 구원이 존재한다면 기적이 없는 곳은 전능하신 하느님이 그냥 내버려두고 같이 고통스러워만 했다는 말이 된다. 이 문제를 다룰 때면 사건의 원인보다는 그에 대한 해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혼란스러운 세계와 계속 마주할지라도 모든 존재의 최종적 근거는 사랑이신 하느님이다" 라는 정도의 대답을 들을 뿐이었다.

 

 

사진4. 수많은 종교의 신 상이 사실은 하나로 통한다면?

 

 

[다른 종교의 신도 결국 같은 하나의 신으로 보는가?]

Q : 세상 도처에는 각기 다른 하느님 상이 존재한다. 그것은 결국 같은 하느님인가?

Q :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그분께 대한 신앙이 다른 종교의 신 상보다 우월한가?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진심으로 존중할 수 없는걸까?

다행히도 저자는 타 종교와의 교류를 오히려 장려하고 필요하다고 한다. 다만 사상의 옳고 그름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각자의 관점을 새롭게 하고 오히려 그 속에서 각자의 종교를 더 폭넓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결국 하느님은 한분이고 기독교의 하느님 상이 자신에게는 옳지만 서로의 신 상과 비교하면서 그들에게 무엇을 배울수 있을지, 어디서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자문하는게 중요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타종교 관점을 존중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존중의 선은 당신 믿음을 멋대로 부정하지 않겠다, 당신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라는 상호조약 속에서 의견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종교인이라면 근본은 다를지라도 사건에 대한 행동은 동일할 것으로 생각된다. 타종교에 대한 존중의 적정 선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께서 가장 순수하고 친근한 하느님상을 선포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른 종교의 신의 모습과 거리를 둔다. 하지만 그들의 것을 존중하면서 때로 하느님께 대한 좁은 시각을 확장하는 기회로 받아들인다. 지금껏 간과했던 측면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열리게 될 것이다." "하느님상이 다른 종교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님말씀하신 하느님상에 다가가려면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다른 개념도 부정하지 않는다."

 

 

[부활과 구원을 믿을 경우 삶에 미치는 영향]

Q :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이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변증법적 유물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삶에서 갖는 의미는 변화되지 못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참혹한 죽음조차 부활로 변화되니 죽음또한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부활은 희망을 상징한다". 내 생각에는 변증법적유물론을 받아들여도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기에 납득되지 않는다면 굳이 애써서 믿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잘 모르기도 하고 피상적인 설명이긴 하지만, 정반합을 거쳐 계속해서 변화해 가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를 받아들이는 변증법적 유물론). 저자의 말에 동의 하기는 하지만 내 삶에 선택을 가다듬는 방법은 부활을 믿는것 말고도 많다. 오히려 부활을 믿으면 기존에 이해하던 세상의 모습에 충돌하기만 한다. "우리는 부활을 바라볼 때만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난관을 가리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왜 기독교에서 부활을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다. 모든 어둠을 밝히는 사랑이 부활이고 그것이 믿음으로 가까워진다고 믿는다면 그것도 자기 삶을 사는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재미있게도 이는 강요될 필요가 없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처럼 자신의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 신비를 하느님으로 생각하지는 않아도 그분께 자신을 개방한거나 다름 없습니다." 

 

 

사진5. 내 눈을 바라봐...

 

 

[영적 체험을 한 신앙인들에게]

Q : 믿는 이들은 늘 도덕적이며 바르게 행동하나요? 

 

 

하느님을 만났다는 체험?으로 믿음을 지속하게 하는 사람들

저자는 신앙인들이 영적체험 이후에 그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로서 드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만일 우리가 이 영적인 체험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영성은 허울뿐인 자기도취적 경향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아마 여기서 말하는 실천은 자신이 만난 하느님을 광적으로 믿어서 열심히 남에게 전파하는걸 말하는게 아닐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더 가치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그 사건이 내 생명이 기적적으로 연장된 일이라면 그것이 나를 위해 특별히 일어난 기적으로 받아들이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그로 인해서 앞으로의 자신의 삶을 더 소중히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것 아닐까 싶다.

 

 

사진6. 참 그거만 안 먹었어도

 

 

[원죄]

Q : 나는 죄인인가요? 죄란 무엇인가요? 

 

 

죄인, 죄인, 죄인

옛날부터 기독교가 인간의 원죄를 들먹이면서 사람들을,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모두 죄인이라고 부르는게 아니꼬웠었다. 저자는 신앙인들이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오만함을 경계하고 겸손한 태도를 가지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아마 보통 사람들에게 '너는 죄를 졌으니까 하느님을 믿어야 회개가 가능하다' 라는 식의 협박을 하려고 생긴 말이 결코 아니라는 얘기인듯 하다. 

 

 

사진7. 과연 그럴까?

 

 

[신앙에 의심이 든다면]

Q : 신앙을 의심하면 안 되나요? 

 

 

띠용? 나도 신앙인이 었네

저자는 의심이 본질적으로 신앙에 속한다는 신기한 답변을 했다. "왜냐하면 신앙은 하느님에 대해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모든 이해 가능성 저편에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의심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의심은 신앙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서 비롯되고 인간의 제한된 능력으로 인해 생기는 의심 역시 신앙에 속합니다. 의심은 우리가 믿는것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밝히도록 만들고 그 배경을 묻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는 길로 새로이 나서게 됩니다". 믿지 않는데도 신앙인보다 더 의심하는 사람은 이미 신앙인이라는 정말 마음넓은 포용력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사진8. 이거 한 방 이면 됩니다!

 

 

[종교는 일종의 마취제]

Q : 많은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는 언제 실현되나요? 

 

 

모든 것이 허락되는 세상 속 에서

악행이나 죄에 대한 형벌은 지옥이나 심판같은 스스로 경계해야할 대상으로하여금 대가를 치른다고 보고있는 기독교. 남의 것을 빼앗고도 잘먹고 잘사는 인간들에게 기독교는 '르상티망'으로 보복한다. 니체는 그런 태도가 비굴하고도 소극적인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했고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고 생각만 고쳐먹는 마취제같다고 했다. 나는 아직 그 말에 적극 적극 동의한다. 누군가 갑자기 5리를 가자하면 안 간다고 해야지 왜 10리를 가주고 자신이 선심쓴것처럼 구는가. 왼쪽 뺨을 맞으면 왜 오른쪽 뺨도 내어주는가. 그건 삶의 주인이 되는게 아니라 주인의 기분만 느끼는 여전한 노예 일 뿐, 치료제를 먹고 병이 낫는게 아니라 진통제만 먹고서 아픔만 참고 증상이 없으니 병이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것과 똑같은 이치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삶을 거부한다. 더 맞고 더 아프더라도 매번 물린 살점을 뜯어가게 내버려두는 것 보다 맞서 싸워서 극복하는 삶이 더 좋다. 행복한 삶을 위해 고통은 무조건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더 멋진 행복을 위해 기꺼이 감내해야할 시련이다.

 

 


 

 

종교를 이해하려고 하면서 얻게 된 것 

나는 증명되지 않는것은 모른채로 일단 두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있어서는 내 스스로 증명이나 입증이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기정사실화하여 믿고 있던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다른 이의 어떤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할 방법도 아직 없고, 그 생각을 짓밟는 책임을 지지도 않을거면서 무턱대고 잘못 됐다고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 이번 공부의 핵심이었다. 또, 믿음을 강요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선에서 반격할 힘을 얻게 되었다

 

 

결론지은 종교의 역할

늘 그렇다. 종교는 어떤 일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답을 줄 수 없다. 이것에 무턱대고 답을 제시하고 행동을 강요하는 종교는 잘못된 종교다. 2000년 1월 1일에 인류가 멸망할거라는 둥, 너의 고통은 전생의 죄라는 둥, 자연재해는 신의 징벌이라는 둥 하는 말들은 전부 다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본인이 무언가를 사실이라고 믿으면 정말 그게 사실인 세상에 갖혀 살게될 뿐이다(가령 평평지구를 믿으면 평평지구인으로 살게 된다. 그 뿐이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모순적인 세상을 보면서 하느님이 지상천국을 만들지 않은 건 그게 꼭두각시 같은 삶이니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살인은 어쩔수 없다는 식의 구차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다.

종교의 역할은 이미 일어난 사건, 갑작스런 화, 삶에서 발생한 문제를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되는 수많은 방법 중에 하나일 뿐이다. 어떤이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행동하고 어떤이는 책을 통해 배우고 어떤이는 학교에서 배우며 어떤이는 계속해서 방법을 찾아 교정해 나간다. 그 방법에는 옳고 그름 따위는 없고 그저 행동하는 본인과 그 행동에 책임지는 본인이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종교의 역할

공부하면서 함께 참고했던 법륜스님의 말씀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인간 두려움의 근원은 모르는 것에 있다". 사람들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아는 일 보다 모르는 일을 두려워한다. 익숙한 장소보다 낮선장소를 두려워한다. 모두가 반드시 겪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그 두려움을 덜기위해 사람은 검증과 증명의 등불을 밝히고 세상을 알아왔지만 죽음은 아직도 완전한 미지의 대상이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종교를 창조해내서 믿음을 발휘하여 죽음이라는 미지의 공포에 대항했었다. 밝혀진 진실은 없고 진실을 밝힌 종교도 없으며 그게 맞는지 아닌지 따질 필요도 없다. 종교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의 공포가 덜해지고 삶을 살아가는데 위안이 되었다면 종교는 그걸로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만 있었다.

법륜스님이 이런 말씀도 하셨다. "영혼은 있다고 믿으면 있고 없다고 믿으면 없다". 사람은 존재가 정확히 확인되 않은 것을 믿으면서 더 잘 생존해왔다. 귀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있다고 믿으면 정말 귀신이 있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처럼 살 것이고 없다고 믿으면 정말로 없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과 같아질 것이다. 평행우주로 생각해봐라. 귀신이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에 둘다 사람이 살고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처럼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의 고양이를 마주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우리는 귀신이 있는 세상에 살수도, 없는 세상에 살수도 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 예수님도 마찬가지, 알라도, 부처도, 올림포스12신도, 스파이더맨도, 토토로도 전부 믿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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