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역사

(이순신 + 세종대왕?) 튀르키예의 국부, 아타튀르크

Retyper 2022. 12. 24. 20:35

 

저것은 영원히 빛나는 나의 국가의 별이오. - 터키의 국가 <독립행진곡> 중에서 -

 

 

사진1.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아타튀르크는 "튀르크의 아버지"라는 뜻

한 나라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공식적으로 칭호까지 만들어져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다니 굉장하다. 무스타파 케말은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런 역사를 만들고 튀르키에 공화국을 건국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이번기회에 찾아보았다. 이하 내용들은 위키백과와 네이버 지식백과를 참고하였다.

 

 

평범한 태생, 하지만 빠르게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남자

1881년 지금의 그리스영토인 살로니카에서 태어난 무스타파는 국경세무관리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전직 군인이어서인지 무스타파는 군인이 되고 싶어했고 스스로 군사중등학교에 입학해버리고 만다. 어린 나이에 이렇게 주도적으로 자신의 앞길을 밟아는 모습에서 부터 비범함이 느껴진다. 그 학교에서 수학선생님으로 부터 '케말' 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는데 '완전함'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살다가 누군가에게 새롭게 부여받을 수 있다는게 특이한 문화라고 생각된다. 

 

 

사진2. 과거 콘스탄티노플, 현재의 이스탄불

 

 

오스만 제국의 몰락

오스만제국은 13세기말 오스만 1세에 의해 건국되어 발칸반도까지 정복한 거대한 나라였다. 심지어 1453년에는 메흐메트2세가 천년요새 콘스탄티노폴리스(지금의 이스탄불)를 점령했고 이후 17세기에는 아래 그림과같은 엄청단 영토를 소유했으며 20세기 초까지 존재해 왔다. 그러다 이슬람의 99구번째 칼리프이자 오스만제국의 34대술탄이었던 압뒬하미트 2세를 마지막으로 1908년 청년 투르크당에 의해 폐위되며 입헌군주제가 되었다.

 

 

사진3. 17세기 말 오스만제국의 영토. 출처 : 위키피디아

 

 

반독재주의자

무스타파 케말은 독재에 반대하여 24살의 어린나이에 체포된 적이 있다. 몇 달 간 구속되었다가 전 학교 교장이었던 '마호페트 리자 파샤'(파샤는 오스만 제국의 고관, 고급군인의 칭호이다)의 변호로 풀려났다. 하지만 그의 가치관은 변하지 않았고 청년 비밀결사 단체인 '조국과 자유'에 가입하여 1908년에 일어난 청년 튀르크 혁명에 가담하였다. 입헌군주제로의 혁명은 성공했지만 그는 한 층 더 나아가 군의 비정치화를 주장했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변방 리비아 지방으로 좌천되어 버렸다. 어쩌면 이때의 좌천이 세계의 역사를 바꾼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와 튀르크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1911년이었다.

 

 

이탈리아-튀르크 전쟁과 발칸 전쟁

이탈리아는 19세기 말부터 아프리카 경영에 착수하였는데 오스만 투르크에서 청년 투르크당에 의한 내란이 일어나자 이를 틈타 이탈리아가 진작부터 탐내고 있었던 오스만투르크령 트리폴리를 점유하여 마침내  전쟁이 벌어졌다. 이탈리아군은 트리폴리를 완전히 점령하고, 또 이탈리아 해군은 에게 해의 오스만투르크령의 몇 개 섬을 점령하였다. 이때, 발칸 국가들이 연합해서 오스만 투르크에 전쟁을 선포하였으므로 1912년에 오스만 투르크는 어쩔 수 없이 스위스 로잔에서 이탈리아와 '우시 조약'을 맺고, 트리폴리와 키레나이카를 할양하였다. - 책 <한 눈에 들어오는 역사상식 - 살아있는 세계사 5> / 그림책편집부 / 그림책 -

리비아로 발령받은 무스타파에게는 15만명에 달하는 이탈리아 군대가 눈앞에 있었다. 반면 그에게는 모아봤자 3만도 안되는 병력 뿐이었다. 본국에서는 예맨혁명 진압을 위해 병력이 이미 차출되어있어 군사적 물자적 지원도 받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규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무스타파는 여러번 이탈리아 군을 격퇴시켰고 특히 토브룩 전투에서는 토브룩에서 이탈리아군을 몰아내는 대승도 거두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달 1912년 1월에 항구도시 데르나에있는 이탈리아군 본진 공격에 들어가다가 컨물에 튄 석회암 파편을 왼쪽 눈에 맞아 각막을 다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맹하게 싸웠고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이 끝날때 까지 그의 지역을 지켜낸다. 아쉽게도 바로 이어진 발칸 전쟁으로 인해 이탈리아 왕국에 트리폴리타니아, 페잔, 키레나이카(현재의 리비아)를 넘겨 줬지만 그는 전쟁영웅으로 돌아왔다.

 

 

사진4. 열세를 극복하고 나라를 구한 조선의 영웅 이순신

 

 

정지적으로 소외당했던 전쟁영웅 (16세기 먼 동쪽나라 큰 전쟁 속 누군가와 닮았다...?)

연이어서 발생한 전쟁으로 지쳐있던 오스만 제국은 눈엣가시인 신흥전쟁영웅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해졌다. 발칸 전쟁에서 발칸반도 영토를 대부분 잃게되는 오스만 제국이었지만 무스타파는 전쟁지휘관으로 투입되어 불가리아 왕국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고, 이어서 터진 1914년 1차 세계대전때 19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평민출신 그의 나이 고작 서른 둘이었다. 

 

 

 

Dardanelles and Gallipoli peninsula - Google Arts & Culture

This map of the Dardanelles and Gallipoli peninsula was specially drawn to illustrate the operations by land and water which began in the spring of 1915 an...

artsandculture.google.com

 

 

갈리폴리 전투

영국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은 바다의 제왕이었다. 당시 지구상에서 바다에서 영국을 이길수 있는 자는 없었다. 1차 세계대전중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 반도로 향했다. 함포사격과 상륙작전을 개시하였으나 무스타파 케말의 기민한 전술과 오스만의 완강한 저항 끝에 양측에 연합군 약 25만명, 오스만 약 21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었고 승승장구하던 서구열강은 퇴각하였다. 이 갈리폴리 전투 이후 케말에게는 '파샤'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천하의 윈스턴 처칠은 이때의 패배로 총관직에서 물러났다.

갈리폴리 전투에 대한 내용은 '토크멘터리 전쟁사' 영상에서도 재밌게 설명되어있다.

 

 

동영상1. 유투브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사, 갈리폴리 전투

 

몰락하는 투르크, 비상하는 케말 파샤

1차 세계대전 이후로 오스만은 힘도 영토도 모두 잃어 1918년 10월에 항복을 선언했다. 1920년 8월에 맺은 세르브 조약에서 이스탄불 일대와 아나톨리아 반도만 남겨졌고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가, 서쪽에서는 그리스가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1919년 그리스가 적대 행위를 했을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국내질서를 회복하지 못하고, 외국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할 줄 모르는 현 정부를 불신임한다… 이제 우리는 제국의 허울을 벗고, 터키 민족국가를 수립하여, 국난을 극복해야만 한다”. 이는 즉 투르크계 황실을 위한 이슬람 제국이 아닌 근대 터키 공화국을 선언하는 것이였다. 이로인해 직위해제된 케말 파샤 였지만 "아나톨리아-루멜리아 권리옹호동맹"을 결성 하기도 하고 내륙에서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기도 하는등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를 이어갔으며, 결국에는 침략해 들어온 동쪽의 아르메니아와 서쪽의 그리스를 모두 물리치면서 1923년 자신을 지지하는 청년 장교들과 앙카라를 장악, 오스만 제국을 무혈혁명으로 멸망시켰다.

 

 

사진5. 튀르키예의 국기 '아이일디즈(월성기)'

 

 

터키 공화국의 초대대통령

1923년 10월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천도하고 공화제를 선포한다. 그가 추앙받는 이유는 단지 전쟁성과뿐만 아니라 취임시절에 단행한 개혁정책에 있기도 하다. 15년간의 재직기간이 신국가 건설을 위한 최선이었는지 그저 독재일 뿐이었는지는 남겨진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1300년의 칼리프제를 폐지하고 여성의 복장과 교육권, 참정권을 보장했으며 일부일처제, 심지어 튀르키예어의 아랍문자 표기법을 폐기하고 로마자 표기법으로 변경하였다.

 

 

사진. 터키의 화폐 '리라'

 

 

소박한 마지막

과도한 음주로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을 직감한 그의 유서에는 "모든 재산은 인민당에 기증할 것이며,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여동생 '막볼레'와 다섯 명의 딸(양녀)들에게 적당한 생활비를 기증하라." 라는 간단한 문구가 남겨져 있고 두 달 후 "모두에게 평화를..."이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며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근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튀르키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에 대한 존경의 일환으로 터키의 화폐 리라화 지폐에는 아직까지도 무스타파 케말 한 사람 뿐이다.

 

 

 

살아있는 영혼, 터키의 국부(國父) '아타튀르크'

살아있는 영혼, 터키의 국부(國父) '아타튀르크'

monthly.chosun.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