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역사

한국사 심화 정리 - 27

Retyper 2022. 9. 8. 18:16

본 정리는 이투스에서 제공하는 최태성 선생님의 무료강의를 수료하며 독학과정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투스 :: 세계 최초 메타버스 교육플랫폼

1년 동안 서비스 이용이 없으신가요? 본인 확인 후, 정상적인 서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go3.etoos.com

 

사진1. 고요한 아침의 나라. 선조들이 원했던 미래. 그들과의 소통.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한국사 공부

 

 

약 70만년전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

 

 

  전근대 근대 근현대
시기 선사, 철기 ~ 예수탄생 ~ 고대 1000년 고려 500년 조선 500년 ~ 1876년 강화도조약(개항기) ~ 1910년 경술국치(일제강점기) ~ 1945 광복~
주안점 PESC모델중심 접근(나는 PEC) 인과관계에 집중 인과관계에 집중

 

근대와 근현대에서 주안점은 인과관계이다.

 

37강. 일제 강점기 (1930년대 이후 저항)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 1945년 8월 15일 광복 까지.

일제정책 : 10년대, 20년대, 30년대 에서 보통 2문제

정책에 대항한 저항사 : 국내, 국외의 각각 10, 20, 30년대

 

1920년과 30년은 저항의 양상이 달라짐.
1931년에 만주사변이 발생. 중국이 일본을 확실하게 적으로 인식하면서 20년대 미쓰야 협정으로 독립군을 잡아넘겼던 중국이 이제는 한 중연합작전을 펼칠정도로 우호적이게 됨.
 
 
  1930년대 저항
만주 북만주지역 혁신의회 -> 한국독립당(한국독립군) : 지청천 주도. 쌍성보(1932년), 대전자령전투(1933년) 승리
남만주지역 국민부 ->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 : 양세봉 주도. 영릉가, 흥경성 전투 승리

30년대 중반이후 동북항일연군도 조직됨. 보천보 전투(김일성 항일무장투쟁과 연결됨.)

만주사변으로 인해 일본 괴뢰군이 구성되면서 만주활동이 어려워짐
중국관내 임시정부(김구)
국민대표회의(1923년)에서 개조파와 창조파와 대립하는 가운데 결론을 내리지 못함.
한인애국단 : 이봉창(일본 천황. 실패) 윤봉길(중국 훙커우 공원. 성공하면서 중국의 지원 받게됨)
한국국민당(1935년)
충칭에서 3당(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간 통합 형성한 여당. 한국독립당(1940년)
한국광복군 : 지청천, 장준하(박정희때 유신체제 반대 했던 인물). 미얀마에도 파견하고 OSS부대와 국내진입작전 펴기도 함

의열단(김원봉)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함.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민족혁명당(1935년)
조선민족전선연맹 구축(1937년). 산하부대 조선의용대(1938년. 중국관내 최초의 한인부대)

1942년. 김원봉이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 지청천, 부사령관 김원봉.
김원봉과 함께 하지 않았던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인원들은 마오쩌둥에 합류하려는 과정에서 일본과 전투(호가장 전투. 1941년). 이후 중국 옌안에서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됨.
국내 국어
20년대에서 이어졌던 문맹퇴치운동(브나로드 운동. 동아일보 주도. 30년 초반까지만 활동함)
조선어연구회 -> 조선어학회 : 최현배. 이극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제정(기출임). <한글>잡지도 여전히 발행중. 우리말 큰사전 편찬 시도함(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벌어지며 실패).
시인 : 저항시인(윤동주, 이육사), 친일시인(서정주. 노천명)

역사
민족주의사학(신채호 박은식의 계보) : 정인보('얼' 강조). 조선학운동(여유당 전서. 정약용 글 정리)
실증주의사학 : 이병도(진단학회. 진단학보 발행)

사회주의
사회경제사학 : 백남운(유물사관. 역사는 법칙에 의해 발전한다. 보편적으로) -> 정체성론(식민지 개화론)을 비판함.
혁명적 조합활동(지하에서 활동) : 강주룡이(여성) 평양 을밀대 고공농성(1931년)
해외 베를린
1936년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 동아일보 일장기 삭제 사건

 

+기출

남자현 : 간도에서 여자권학회를 만드심. 1933년 만주국 주재 일본대사 암살 계획하다 밀정의 밀고로 붙잡힘. 60세가 넘은 나이로 6개월동안 갖은 혹형을 받고 보름에 걸친 단식투쟁 전개로 건강을 잃는다. 보석으로 풀려난 직후 고려여관이라는 조선인 여관에서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던 손자 김시련에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고 안 먹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에 있다'는 말씀을 하신 뒤 옆에 있던 아들 김성삼에게 옷깃을 뜯어 하얼빈 화폐 248원을 끄집어내 건네주시며 '너의 원수는 네가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 우리 독립은 정신'이라면서 '이 돈을 우리나라 독립 축하금으로 바쳐라. 만일 너의 대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도 유언해 실행하라' 말씀하셨다. 이어서 '손자를 대학 공부시켜라. 친정 문호를 이어 달라'고 하신 뒤 '곤히 잘 테니까 깨우지 마라' 라는 말을 남기고 정오 무렵에 순국하셨다. 국가보훈처 차관을 지낸 김시복은 남자현의 손자이다.
이재명 : 1909년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을 저격하여 중상을 입히다.
다음과 같은 최후 진술을 남겼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義魂)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1910년 9월 30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24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40년대 저항
중국관내
조선의용군
우한에 있던 조선의용대. 김원봉 측은 충칭에 있는 한국 광복군에 합류. 나머지는 옌안에서 조선의용군 조직(조선독립동맹. 김두봉 주도. 기출임).

국내 조선건국동맹 : 여운형 주도. 광복 이후에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로 이름 바뀜

 

이때당시 조선독립동맹, 임시정부, 조선건국동맹 모두 정치체제는 공화정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반응형

'인문학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 심화 정리 - 29  (2) 2022.09.11
한국사 심화 정리 - 28  (0) 2022.09.11
한국사 심화 정리 - 26  (2) 2022.09.07
한국사 심화 정리 - 25  (0) 2022.09.06
한국사 심화 정리 - 24  (0) 2022.09.05